[종교] 유치원생이 깨달음으로 무신론자가 되기까지

나는 무신론자이다. 그러므로 믿고 있는 종교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종교는 없지만 신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나는 신, 절대자, 조물주와 같이 불리는 특정 한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겪은 몇 가지 경험과 사례를 통해 내가 왜 무신론자가 되었는지 적어보려고 한다.


경험 1

1992년, 동네 유치원에서 만나 친해진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나에게 교회를 같이 가자고 권유를 했다. 가면 맛있는 걸 준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가오는 일요일에 그 아이와 함께 교회에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엄청 많고 시끄럽고 긴 의자에 빽뺵이 앉아서 뭔가 두꺼운 책을 앞에 놓고 있었다.

곧 이어 찬송가를 부르는데 내용이 하나님 어쩌고 천국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어른들이 보기에는 고작 유치원생이었지만, 나는 손범수 아저씨가 진행하는 가요톱텐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동요 같은 건 수준이 낮은 노래고 나와 맞지 않는다고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가 구리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려 버렸다. 특히 가사가 구렸다.


그리고 예배 중간에 십자가가 그려진 갈색 호그와트 마법주머니같은거에다가 사람들이 돈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내 또래애들은 부모님께 천원짜리를 받아서 주머니에 돈을 넣었다. 그때 당시엔 헌금이 뭔지 그리고 십일조라는 개념을 모른 채, 그 마법 주머니가 신자들의 돈을 빨아먹는 모습을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돈은 없고 가진거라곤 부랄 두짝이 전부인 유치원생이기 때문이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나서는 기도를 한다고 손에 깍지를 끼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외는데 내용이 유치원생인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시작부터 대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데, 우리 아빠는 집에 잘 있는데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그날의 예배가 끝나고, 요구르트와 초코파이를 나누어 주었다.

맛있게 잘 먹었다. 아멘. 꺼억.

교회에 이쁜 누나들이 있어서 일단 좀 더 다녀볼까 생각했다.


경험 2

교회를 좀 다니다 보니, 찬송가 책이랑 성경책을 사라고 눈치를 준다. 나 돈 없는데.

교회에서 나보고 집에가서 부모님께 돈을 받아오라고 한다.


아버지께서 장남인 관계로 태어날 때부터 조부모님과 한 집에 함께 살았었는데,

내가 교회에 나가는 걸 싫어하셨다.

특히 우리 할아버지는 제사를 지내주어야 할 손자놈이 교회에 빠져 본인 제사를 지내지 않는 예수쟁이가 될까봐 불안해 하셨다. 죽은 다음에 상에 식은 음식 올리고 절하는게 뭔 의미도 없는 뻘짓인가 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하긴 했지만 나는 착한 손자 코스프레를 해야 했기에, 열심히 제사 지내드린다고 립서비스해드리고 용돈받아서 그 돈으로 블랙모터 달린 미니카 샀었다.

아버지께서는 일요일에 할일 없이 모여서 시간 낭비하고 있는 나사 빠진 인간들이나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다른 애들이 모태 신앙이라면 나는 모태 무신론자인 것이다.


당연히 집에서는 돈을 못받을 것 같아서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 돈달라고 했더니 교회 나가지말라고 하신다고. 그랬더니 그 후로는 나에게 책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경험 3

92년 늦여름인가 초가을즈음, 어느 일요일에 교회에서 달란트 시장이란 걸 했다.

지금까지 모은 달란트도 물건도 사고 먹을거도 사먹는거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갔더니, 내가 모은걸로는 컵에 담긴 떡볶이 하나도 먹을 수 없었다.

부모님께 돈을 받아 헌금을 했던 아이들은 많은 달란트를 갖고 있었고 그 달란트수저들은 산유국 왕자들처럼 달란트를 물 쓰듯 쓰고 있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그냥 현찰로 떡볶이를 사 먹는게 훨씬 저렴했다. 뭔 짓인가 싶었다.


경험 4

93년 3월, 동네 골목길에서 놀다가 대우 르망이라는 자동차에 치어서 공중에 (체감상)몇 초 동안 붕 떴다가(길지 않았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감을 느끼고) 아스팔트 바닥에 몇 바퀴를 굴렀다.

양측 다 과실이 있었다. 운전자 아줌마는 동네 골목길에서 40km/h의 속도로 악셀을 때려 밟았고, 유치원생은 골목길에서 나올 때 미리 양쪽을 살피지 않은 점이다.

어쨋든 상태를 확인 해 보니, 얼굴은 아스팔트와 부비부비를 해서 피가 흐르고 있고, 다리는 조금 빨갛긴 했는데 괜찮아 보이는것 같아서, 먼지를 툭툭털고 일어났는데, 바로 다리에 힘이 풀려 고꾸라져 버렸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엄마를 불러오고, 곧이어 119도 왔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 일단 응급처치를 받고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왼쪽 허벅지 골절이었다.

철심을 왼쪽 허벅지에 박고 고정하는 수술을 했는데, 마취를 해도 뒤지게 아팠다. 수술실이 떠나가도록 울부 짖었다.


몇 달 동안, 병실에 누워있는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누가 불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모르는 아줌마 3명이 손에 성경책을 들고 오더니 치유 기도를 해 준다고 한다.


"하나님 어쩌고 어린양에게 시련을 주옵시고 저쩌고..."


나는 양이 아니고 사람이고, 양측 과실로 인해 사고가 난거였는데... 

안그래도 병실에서 몇 개월째 누워서 사골국물만 마시고 있어서 짜증이 나있었는데.

자꾸 제3자를 끼게 해서 듣기 싫었다.


경험 5 (부제 : 깨달음)

6개월 넘도록 다리에 깁스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몇 개월 남은 유치원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국민학교에 입학 하게 되었다.

94년 3월, 방과 후에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모여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했다.

약 25년 후에 오징어게임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그거 맞다.

어쨋든 그거 하다가, 넘어져서 무릎팍이 깨져서 피가 났지만 부상투혼을 발휘해 끝까지 놀다가 집으로 왔다.

상처난곳은 며칠이 지나자 딱지가 앉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가 다시 넘어져서 다쳤던곳을 또 다쳤다. 이번엔 중간에 지지치고 집에와서 입에 수건물고 2번 깨져 피가나는 무릎팍에 아까징끼 바르고 밀려오는 고통을 감내하였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다시 상처에 딱지가 앉았고, 일요일이 되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회로 향하는데... 앗 그만 스텝이 엇갈려서 자빠졌는데, 아 글쎄 똑같은 곳을 3번이나 다친 것 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하나님을 믿으러 가는 교회 가는 길에 같은 부위를 또 연속으로 다친거면 신의 가호따윈 없구나! 다 거짓부렁이었어! 


혹자는 내게 그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그딴 소리가 주둥이에서 나오나.

안그래도 평소에 착하게만 살아왔는데 원죄 어쩌고 하면서 모두 태어날때 부터 죄인이라지 않나 X나 맘에 안들었었는데, 내 무릎팍께서 같은 곳을 3번이나 깨짐을 당하고 깨달음을 주셨다.


그 이후로 30년 넘게 나는 무신론자의 길을 걷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시길 "무신론자는 그들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무신론자들은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 죄가 된다” 며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지키는 것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해 늘 판단한다는 뜻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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